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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제화의 부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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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라이더 조회 1회 작성일 24-09-19 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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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한 부부가 자녀를 비슷한 시간으로 나눠 양육하는 걸 공동양육이라고 합니다.
외국에선 익숙하지만 우리나라에선 아직 생소한 방식인데요. 최근 공동양육을 하란 판결이 이례적으로 내려져 관심을 모으고 있습니다. 여현교 기자입니다. 이혼 소송 전문 변호사인 주인공이 직접 양육권 분쟁을 하는 드라마. 부부의 치열한 다툼 속 딸은 갈등을 겪습니다. 이처럼 한쪽만 양육자가 되는 게 익숙한 우리 사회에서 최근 부부 모두를 공동양육자 로 지정한 판결이 나왔습니다. 조정이나 합의에서는 드물게 이뤄지지만 판결로 선고된 건 이례적입니다. 지난 2021년 남편 A 씨는 혼인 파탄 책임이 아내에게 있으니 자신을 양육자로 지정해달라는 소송을 냈습니다. 아내 B 씨는 자신도 양육하겠다며 공동양육을 요청했는데 지난 4월 재판부가 B 씨 손을 들어줬습니다. 세 자녀에 대한 양육자 및 친권자를 양쪽 모두로 지정한 겁니다. 재판부는 둘 다 부모 역할을 적절히 분담해 왔고 각자의 갈등 해결능력을 볼 때 아이들의 행복과 이익을 위해 최선을 다할 걸로 보인다고 설명했습니다.
특히 재판부는 판결에 구체적인 방법을 포함했는데 일주일 중 평일과 주말을 나누고 연휴와 생일 등도 시간을 나눠 보낼 수 있도록 했습니다. 공동양육 은 미국과 독일 등에선 익숙하지만 한국 가정법원에선 이제 시작 단계입니다. 대법원은 자녀가 두 가정을 오가며 혼란을 겪을 우려가 있다며 공동양육을 한 번도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가정법원 재판과 조정 과정에서 사회변화를 반영하는 움직임이 늘고 있습니다. 반짝반짝하게 닦은 구두를 신고 걸어가는 사람들을 보기 드물다. 헐렁한 옷과 편한 신발을 선호하는 사람이 늘면서 딱딱하고 불편한 이미지의 구두는 점점 밀려나고 있습니다. 정장 차림에도 운동화를 신는 게 어색하지 않으니 굳이 구두를 신을 이유가 없게 됐습니다. 어려워진 것은 구두를 만들어 파는 제화업계다. 제화업계의 경영난은 10여년 전부터 시작됐습니다. 1990년대에 업체들의 경쟁이 심해지고 상품권을 남발하면서 서서히 그런 조짐이 보였습니다. 이후 외환위기와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매출이 크게 줄었고 설상가상으로 소비자들이 구두를 외면하면서 업체들의 사정이 더 나빠졌습니다. 국내 3대 구두 브랜드는 금강제화와 에스콰이아 엘칸토였습니다.
이 가운데 에스콰이아는 경영난 끝에 2015년 패션그룹 형지에 인수됐습니다. 에스콰이아는 서울 명동에서 작은 구둣방을 운영하던 고 이인표 회장이 1961년 창업한 기업입니다. 영에이지 라는 캐주얼화 상표의 기억이 남아 있습니다. 엘칸토는 외환위기 때 부도 위기를 맞았다가 최대주주가 세 번이나 바뀌는 고난을 겪었습니다. 현재 최대주주는 사모펀드다. 1957년 미진양화 로 출발한 엘칸토는 브랑누아 브랜드도 유명했습니다. 엘칸토는 최근 MZ세대를 겨냥한 신제품으로 부활의 날개를 펴고 있습니다. 제화업계 1위 금강제화는 창업주 가계가 경영권을 잃지 않고 아직 건재합니다. 성공한 사업가의 모습은 갤럭시 양복과 에쿠스 자가용에 이어 금강제화 구두로 완성된다고 했을 정도로 금강의 브랜드 가치는 높았습니다. 김대중문재인 대통령만 제외하고 역대 대통령들의 구두를 만든 곳도 금강제화다. 금강제화는 김동신 회장 이 1954년 서울 서대문 적십자병원 맞은편에 낸 작은 구둣방 금강제화산업사 가 모태다.
올해 창립 70주년을 맞았습니다. 북한 흥남기술전문학교를 졸업한 김 회장은 함흥에서 구두를 만들다가 월남해 구둣방을 열었다고 합니다. 김 회장은 최고가 아니라면 판매하지 않는다는 경영철학으로 제화기술연구소를 만들었습니다. 국내 처음이었습니다. 금강제화는 1960년대 초 서울 광화문에 기계로 구두를 만드는 최초의 기성화 매장을 내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습니다. 기다릴 필요도 없이 신어보고 바로 구매할 수 있는 기성화는 날개 돋친 듯 팔렸습니다. 그중에서도 절개선이 특징인 신사화 리갈 의 인기는 최고였습니다. 소비자물가지수 측정 품목에 들 정도로 베스트셀러였습니다. 1973년에 나온 랜드로바 는 캐주얼화의 대명사가 됐습니다. 입학이나 입사 시즌이 되면 금강제화 시내 지점은 고객들이 물밀듯이 몰려들어 번호표를 나눠줘야 했고 명동매장에서는 세일 때 손님들이 밀어붙여 유리문이 부서진 일도 있었습니다. 1990년대에는 명절을 앞두고 명동점에서만 구두가 3000켤레나 팔렸다고 합니다.
구두상품권을 가장 먼저 도입한 곳도 금강입니다. 그러나 구두 문화의 퇴조에 잘나가던 업계 1위 금강제화도 맞서기 어려웠습니다. 분양의 모든것 1호점 광화문 매장은 재개발로 40여년 만인 2006년 문을 닫았습니다. 그때는 이미 구두업계에 서서히 불황이 닥친 시기였습니다. 2012년 3715억원까지 이르렀던 매출은 2017년 3000억원이 무너지고 추락하기 시작했습니다. 현재는 1000억원대로 급감했습니다. 금강은 김동신 회장의 손자로 오너 3세인 김정훈씨가 구조조정을 단행하고 사업을 다각화하면서 새로운 도약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대표이사는 신기은이화진씨로 돼 있습니다. 제화 기술자들이 40여년 동안 구두를 제작하던 인천 부평 공장도 세종시로 옮겼습니다. 다른 기업들이 동남아로 공장을 옮길 때도 국내 생산을 고집하며 지켜냈던 공장이다. 그래도 전국에서 지점을 운영하며 매입해 둔 부동산이 금강제화의 버팀목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부전동에 있는 금강제화 자리는 부산에서 땅값이 가장 비싼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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